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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는 잡다한 지식들

6.25 전쟁, 한국 전쟁

by 리지하이 2023.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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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은 현충일 이외에도 6.25 사변일이 있습니다.

6.25 전쟁 또는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이 불법 남침한 전쟁으로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왜 이런 비극이 발생했을까요?

 

1945년 일본이 전쟁에서 패하고,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지는 줄 알았지만 현실은 냉혹했습니다. 북위 35도선을 기준으로 북에는 소련이 남에는 미국이 진주했습니다.

* 진주(進駐)하다: 군대가 쳐들어가거나 파견되어 가서 주둔하다.

 

두 강대국이 들어왔더라도 그냥 평화롭게 살면 되겠거니 했지만, 소련은 남과 북의 왕래와 통신을 단절시켜 정치적으로 분단을 강요했습니다.

 

1949년 3월 북한의 김일성은 소련의 스탈린에게 남침 계획을 알렸고,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중국의 마오쩌둥과도 협의하라고 지시하며 무기를 지원했습니다. 다만, 스탈린은 시기상조라 생각하여 남침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1950년 4월 초, 스탈린은 중국이 동의한다는 조건으로 북한의 남침을 승인했습니다.

 

 

 

대한민국은 북한의 병력과 무기의 대규모 이동을 알고 있었음에도 중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북한은 쉽게 남침을 할 수 있었습니다.

 

소련의 무기를 앞세운 북한은 서울까지 함락했고, 이승만은 서울을 탈출했습니다. 문제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는 알리지 않고 서울을 탈출한 것입니다. 게다가 북한군의 남하를 지연시키기 위해 6월 28일 새벽 2시에 한강대교 마저 폭파시킵니다.

 

이때 서울 시민 90만 명은 9.28 수복 때까지 꼼짝없이 서울에 갇히게 됩니다.

 

 

 

7월 초에 유엔군을 지휘할 통합군사령부가 설치되었고, 맥아더 장군이 유엔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을 돕기 위해 16개국에서 파병을, 5개 국가에서 의료 지원을 했습니다. 또한, 39개국은 물자지원을 하는 등 총 60개국이 지원에 나섰습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펼쳐졌고, 유엔군과 국군이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합니다.

 

급해진 북한은 소련과 중국에 구원을 요청했고, 중공군과 소련군이 참전합니다.

 

결국 1951년 1.4 후퇴로 서울을 중공군에게 빼앗겼습니다. 다행스럽게 유엔군의 반격으로 1951년 3월 15일에 다시 서울을 되찾았습니다.

 

 

1953년 3월 미국, 소련, 중국이 휴전을 원하여 휴전회담이 열렸으나 대한민국의 이승만이 휴전에 반대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북한군의 재침략을 막을 수 있게 보장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논의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이 체결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휴전인 상태입니다.

 

초등학교 때는 곧 통일이 될 거 같았는데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입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을 보면서 한국전쟁이 생각나 더 안타깝습니다.

대한민국에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발생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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